한국오늘의양식사 발행인 겸 분당할렐루야 교회 원로목사님이신 김상복 목사님께서 금년 10월 미국 오늘의양식 사역원에서 본인의 신앙 간증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김목사님: 전 두 형들과 누이가 함께 서서 어머니를 바라보며 작별인사를 하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서둘러 들어가서 형 옆에 섰지요. 어머니는 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어요. “이 아이도 데려가렴.” 전 그렇게 북한을 떠나게 되었죠. 우리 남매들은 수 십만의 피난민들과 함께 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바바라: 자신이 알던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떠나야 하는 열 한살짜리 아이라면 어떨지 상상이 되시나요? 이번 Words to Live By에서는 김상복 목사님의 놀라운 신앙의 여정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안녕하세요. Words to Live By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바바라 팔러스입니다. 매주 저희는 예수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와 성경에서 발견한 지키고 따라야 할 말씀들을 통해 변화된 삶의 이야기들을 소개해 드리고 있습니다. Words to Live By는 삶을 변화시키는 성경에 담긴 지혜를 모든 이들이 이해하고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명을 가진 Our Daily Bread(오늘의 양식) 사역의 한 파트입니다.
유엔난민 고등판무관실의 2016년 통계는 전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의 기록적인 강제이주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전세계적으로 육천 오백 삼십만 명이라는 전대미문의 숫자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만 했으며 그 중 난민의 수는 거의 이천 백삼십만 명에 달하고 그 절반 이상이 열여덟 살이 채 안된 아이들이었습니다.
잠시 생각해 보세요. 자신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비극의 한가운데서 힘겨운 상황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을 말입니다. 살던 곳을 떠나서 타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적응하고 새로운 삶을 일구려고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는 뉴스에도 많이 보도되었습니다.
비록 역사적으로 시대는 다르지만 김상복 목사님 역시 난민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주님께서 목사님의 여정 가운데 보여주신 필요를 따라 공급해 주시고 인도하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그의 신앙을 통하여 영감과 도전을 얻으시리라 믿습니다.
김목사님: 저는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매일 우리 가정은 두 차례 예배를 드리며 성경 말씀을 읽고, 함께 찬양과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 언제나 저희 남매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기도해 주셨어요. 하루에 두 차례 그렇게 기도해 주셨죠. 전 아직까지도 제 이름을 부르시며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합니다.
바바라: 당시 북한에서 한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김목사님은 자신의 친할머니께서 선교사분들이 설립한 학교에 다니셨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목사님의 부모님 역시 목사님 자신이 그랬듯이 당신들의 삶을 주님께 헌신하고 따른 분들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어린 나이에 문제가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했습니다.
김목사님: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일제 식민지 치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신사 앞에서 일본의 천황을 신으로 섬기며 절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크리스천 학생들은 절을 하지 않았죠. 매일 아침 아홉 시에 약 이 천명의 아이들이 일본 쪽을 향해서 절을 했습니다. 저는 절을 하지 않았는데 또 한 명의 학생이 절을 하지 않고 서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제 누이였죠. 다행히 우리는 한번도 걸리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모두 절을 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우리를 못 봤거든요. 비록 어리기는 했지만 우리는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을 하자 한국은 해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을 점령했습니다. 북한 공산당 정권은 어느 학생이나 교사도 교회에 갈 수 없다는 명령을 모든 학교들에 하달했습니다.
그렇게 크리스천 학생들을 향한 체계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죠. 제 기억으로는 학교에서 당시 주일 아침 9시에 무슨 프로그램 같은 것을 만들었어요. 선생님들께서는 “혹시 못 오는 사람 있나?” 라고 하셨죠. 몇몇 크리스천 학생들이 못 온다고 손을 들었어요. 그랬더니 “변명하지마! 무조건 아홉 시까지 오도록 해!” 라며 다그치셨어요. 하지만 크리스천 학생들은 모두 주일 아침이 되자 학교가 아닌 교회로 향했어요. 월요일 아침이 되자 선생님께서 일고여덟 명의 크리스천 학생들을 교실 앞쪽으로 불러 세우시고는 물으셨어요. “넌 왜 안 왔지?”
첫 번째 학생이 “선생님, 실은 저 교회에 갔었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생님께서는 그 아이의 뺨을 내려치셨어요. 당시에 전 겨우 3학년이었습니다.
그 다음 남자아이도 “넌 왜 안 왔지?” 라는 선생님의 물음에 “교회에 갔었어요.” 라고 답했죠. 아마 제 순서가 네 번째 정도였었던 것 같은데 전 떨고 있었어요. 마침내 제 순서에 “넌 왜 안 왔어?”
“교회에 갔었습니다.” 역시 “찰싹” 하고 뺨을 얻어 맞았어요.
매주 월요일이면 크리스천 학생들은 앞쪽에 불려 세워졌고 어느새 한 명 두 명씩 예배 드리기를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선생님이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셨고 심할 때는 쇠파이프로도 때렸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매주 맞는 일이 계속되었어요. 하루는 그렇게 쇠파이프로 얻어 맞은 나머지 너무 아파서 집에까지 걸어가는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어요.
어머니께서는 공산주의 학교 보다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복하는 저와 우리 형제 자매들이 되기를 원하셨어요. 어머니는 그 때까지 길가에 앉아서 저를 계속 기다리고 계셨어요.
제가 가까이 다가오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라고 물으셨습니다.
“매번 똑같죠 뭐.” 라고 제가 답하자
“뭐라고 하시던?” 하고 어머니께서 또 물으셨어요.
선생님께서 “교회랑 학교 중에 뭐가 더 중요하니? 둘 중 하나를 골라봐!” 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뭐라고 답했니?”
“교회요! 라고 했어요.”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아들이야. 이리 오너라!” 라고 하시며 저를 부엌으로 데리고 가셔서는 가장 크고 잘 익은 빨간 사과 하나를 상으로 주셨어요.
“옳은 일을 한 거란다.”
어머니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는 말씀을 암송하셨어요. 그리고 때로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라는 말씀을 인용하시기도 했어요.
바바라 : 이처럼 김목사님과 그의 가족들은 극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사정은 더욱 나빠지려는 참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남한을 침공하며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남한을 돕기 위해 이 안건을 표결에 붙여 북한군을 그들의 원래 영토로 퇴각시키기 위해 16개국을 참전시키게 됩니다. 전쟁이 발발하던 날 주일 점심 무렵, 김목사님은 밖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삶이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김목사님: 전 두 형들과 누이가 함께 서서 어머니를 바라보며 작별인사를 하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서둘러 들어가서 형 옆에 섰지요. 어머니는 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어요. “이 아이도 데려가렴.” 전 그렇게 북한을 떠나게 되었죠. 우리 남매들은 수 십만의 피난민들과 함께 남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당시 전 열한 살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부모님이 없어져 버린 거예요. 헤어진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을 향한 그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몰랐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새벽 다섯 시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뿐 이었어요. 북에 남겨진 가족들 모두를 지켜 달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기도는 저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께 제 필요를 공급해 달라고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바라 : 그러한 기도는 비단 열 한 살짜리 피난민 소년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 맡겨 드리기엔 너무나 큰 마음의 부담이었을 겁니다. 목사님과 그의 형제, 자매들은 남한의 부산에 피난처를 마련하게 되고 거기서 목사님은 중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할 시기가 되었을 때, 목사님은 더 큰 기회들이 기다리고 있는 서울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김목사님: 서울은 문화, 경제, 정치, 교육 등 모든 것의 중심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계적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가방 두 개를 둘러 메고 기차역을 나와 삼십 분 정도를 걸었을 때, 하얀 이층 건물이 하나 보였어요. 그래서 저는 문을 두드렸죠. 누군가 문을 열고는 “누구요?” 라고 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 왔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서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습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들어가도 될까요?” 문을 열어준 대학생처럼 보이는 남자는 “들어와라” 라고 했어요.
그렇게 그곳에서 지내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학교 등록금이 필요했습니다. 꽤 큰 금액이었는데 당시에 전 정말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든지 제게 등록금을 마련해 주시기를 바라며 매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돈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었어요. 그 날 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주님! 저 학교에 가고 싶어요.”라고 진솔하게 아뢰었습니다.
그 때 제게 음성이 들렸어요. 그리고 그건 하나님의 음성이었어요. “내일 아침이 되면, 아홉 시에 학교에 가서 교장 선생님과의 면담을 신청하거라. 그리고 등록금이 없다고 말씀 드려라.” 그냥 그게 전부였어요. 그래서 전 다음날 아침에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과의 면담을 청했어요. 그리고는 문을 두드렸죠. “누구세요?” 저는 문을 열고 들어 갔습니다. 그 안에는 교장 선생님뿐만 아니라 교감 선생님과 학교를 이끄시는 모든 분들이 함께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기도 중에 들은 하나님이 들려 주신 음성 그대로 그 분 들에게 말씀 드렸어요. “선생님, 저는 북한에서 왔습니다. 부산으로 피난 나와서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도 합격했습니다. 전 가진 돈이 없고 혼자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습니다.” 그곳에 계신 모든 학교 운영진 분들은 제 이야기를 듣고 좀 놀라신 듯 절 바라보셨습니다. “나가 있어라.” 저는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어요. 한 오 분, 십 분 가량 흐른 후에 누군가 “들어와라.” 라고 외쳤어요. 교장선생님께서는 “네가 비록 돈은 없지만, 우린 널 입학시키기로 했단다.” 그렇게 시작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고등학교 진학의 길을 열어 주신 겁니다.
바바라: 김목사님은 학교의 정규 교육 보다 훨씬 더 큰 가르침인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베푸심에 대해 배우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을 가장 힘들었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김목사님: 전 누구에게도 제게 필요한 책, 옷, 음식, 그리고 머물 곳에 대해서 부탁하지 않았어요.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뢰었어요. 하나님께서는 제 기도에 조금씩 조금씩 응답해 주셨어요. 전 혼자였고 어떤 때는 삼일 동안 음식이 없어서 굶곤 했어요.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저를 돌봐 줄 이가 아무도 없었던 그 시절이 제겐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금전도 보살펴 줄 이도 없이 인생의 커다란 시련들을 겪으며 저는 철저히 역경과 외로움을 통해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시기를 극복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어떠한 고난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명문 대학교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정도에 해당하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고등학생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로부터 자신의 집에 함께 살면서 아이들을 가르쳐 달라는 가정교사 일들을 많이 부탁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살 집이 생기고 식사 문제도 해결되고 학업도 병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바라: 김목사님의 스토리가 이어집니다.
김목사님: 하루는 구약학 교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학생에게 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당신을 만드셨고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 분의 목적을 위해서 말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여쭤 본 적이 있나요?”
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여쭤 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단지 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기만 했던 거죠.
이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혹시 고려해 보신 적이 있나요? 하나님과의 매일매일의 관계에 있어서 더욱 그 분과 가까워 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바바라 : 김목사님의 꿈은 교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서 미국에 갈 필요가 있으리라 믿었기에 목사님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아리에 가입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영어를 잘 구사하게 되어 대학교 3학년 때는 서울을 방문 중이던 네 분의 미국인 목사님들을 위해서 통역으로 돕도록 추천을 받게 됩니다.
김목사님: 저의 지인 한 분이 이 저명한 목사님들과 함께 열흘간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열흘이 끝나갈 즈음에 목사님들 중 한 분께서 “우리와 함께 미국에 가보지 않겠나? 모든 비용은 우리들이 책임지겠네.”라며 미국 행을 권하셨습니다. 비록 돈은 없었지만 유학의 길이 열린 거예요. 그 분들이 모든 절차를 이미 마련해 주셨습니다. 전 필라델피아에 도착했어요.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그곳은 신학교였습니다. “그래, 여기서 3년간 공부를 하자.” 전 그렇게 다짐했죠.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어느 날 구약학 교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학생에게 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당신을 만드셨고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 분의 목적을 위해서 말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여쭤 본 적이 있나요?”
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여쭤 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저의 삶의 짐이 너무나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하나님께 여쭌 게 전부였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제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시곤 하셨죠. 일단 그 무거웠던 짐이 사라지고 나면 저는 “하나님 제가 다시 부를 때까지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라고 말했던 셈이예요.
그 날 교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저는 제 행동이 커다란 죄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지 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기만 했던 거예요. 결코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은 채 말이죠. 전 그날 혼자 예배당 남아서 회개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의 죄악을 뉘우쳐야만 했기에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하나님, 오늘부터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게 무엇을 할지 말씀해 주세요.”라고 아뢰었습니다. 그 순간이 저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래, 신학교수가 되자.” 라고 다짐하며 사역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바바라 : 로마 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편지인 로마서 12장 1-2절 말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권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김목사님이 자신의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모두 주께 의탁하고 엎드리자,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신학교를 졸업할 때, 그를 축하하기 위해서 기다리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김목사님이 미국으로 올 수 있게 도와주신 분들 중 한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목사님에게 뉴저지에 있는 자신의 교회에 와서 목회자로 섬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김목사님: “아니요, 전 아직 목사가 아닙니다. 갈 수가 없어요.” 라고 말씀 드렸죠. 그러자 “한달 간 기도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 하셨어요. 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다시 연락하시겠다고 한 날짜까지 하루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에 가책이 생겨 밤 10시경에 15초 정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에게 신학교 교수가 되고자 하는 열정을 주셨잖아요. 이건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죠?”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다음 날 정오쯤에 제가 전화를 주시기로 하셨는데, 적어도 두 번 정도는 기도를 해야 제가 기도를 드렸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서둘러서 똑 같은 기도를 한 번 더 드렸죠. 역시 주님은 이번에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전 안도했습니다.
“기도를 드려보셨나요?” 12시가 되자 연락이 왔습니다.
“네.”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무 말씀 없으시던데요?”
그러자 그 분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라고 기뻐하시는 거예요.
“감사드린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목사님이 기도하셨을 때는 아무 말씀 안 하셨지만, 저희가 기도 드렸을 때는 저희 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모셔오라고 하셨거든요.”
“뭐라고요?”
“하나님께서 저희의 기도에 응답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꼭 담임 목회자로 저희 교회에 오셔야 합니다.” “매일 학교에 가셔도 됩니다.”
“매일 학교에 가면 사역은 언제 합니까?” 라고 제가 묻자.
“수업 마치고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일 년만 있으면 석사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위해서 인디애나로 떠나야 하는데요?” 라고 말씀 드렸지만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 년을 섬긴 후, 박사과정 공부를 위해서 인디애나로 떠났습니다. 그곳에 한 교회가 있었는데 “다음주에 저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해 주실 주 있나요? 라고 부탁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전했죠.
“한 주만 더 오셔서 설교해 주실 수 있나요?”
“네. 좋습니다.” 라고 답하고 또 한 차례 더 갔죠.
“한 번만 더 와 주실 수 있나요?”
그렇게 다시 찾아 간 세 번째 주일날 장로님들이 “저희의 목사님이 되어 주실 수 있나요?”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래서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사가 되었죠. 그 이후에는 교수가 되었고요. 두 가지 일을 모두 했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저는 조금 더 큰 도시로 가야 함을 느끼고 수도 워싱턴 디씨로 갔습니다. 또 다른 학교에서 저를 신임 교수로 초빙해 주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4만명에 달하는 한국인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때로는 신학교수로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 저를 담임 목회자로 청빙 하고자 하는 분들께서 기도원에서 그 기도 제목을 두고 계속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저도 그것에 대해 주님께 아뢰기는 했지만 사실 더 이상 목회를 하기를 원하지는 않았었죠. 그 분 들에게 답변을 해 드려야 할 마지막 날이 되어 정중하게 청빙 요청을 고사하기 위해서 찾아 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입에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내가 지금 도대체 뭐라고 한 거지?” 하지만 이미 승낙한 것을 다시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목회 사역을 시작하자.”
그렇게 저는 그곳에서 11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하루는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거라.” 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의 세 번째 목회가 시작되었고 이번에도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며 한국에서 교회를 21년 간 섬겼죠. 목회는 하나님의 뜻이었고, 교수직은 저의 뜻이었던 셈인데 꽤 절충을 잘했던 것 같습니다.
바바라 : 김상복 목사님이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삶을 드렸기에 말 그대로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을 보살피는 목회자로서, 김상복 목사님은 성도들 모두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성경의 지혜를 지향할 수 있게 이끄시는 성경 말씀과 여러 자료들을 활용하여 그들을 격려할 방법들을 찾고자 항상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김목사님: 1980년에 미국에서 교육받은 의사와 교수들로 구성된 오늘의 양식(Our Daily Bread)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 분들은 하루 분량의 영어 말씀을 한 단어 한 단어 상고하고 번역을 완성시키면서 영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좀 더 큰 종이에 일 주일 분량의 말씀을 타이핑하여 인쇄했습니다. 성도들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안내위원들이 오늘의 양식 인쇄물을 나눠 주면 “한 부 더 주실 수 있나요?” 라고 물으시며 어머니, 아버지, 이모, 삼촌, 친구 등에 보내고 싶다고 요청들 하시곤 했죠.
그 후 제 기대대로 성도 분들과 많이 이들이 오늘의 양식을 읽기 시작했고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삶에 더욱 평강이 넘쳤고, 주님께 힘을 얻었으며, 직장에서는 갈등의 요소들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삶이 더욱 나아졌습니다. 그 이후로 제가 다른 교회와 도시들로 말씀을 전하러 갈 때마다 항상 마지막 메시지는 “여러분 중 오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신 분이 계시면 제게 꼭 성함과 주소를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좋은 자료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였습니다. 이렇게 전파되기 시작한 ‘오늘의 양식’은 나중에는 미국의 많은 주에 있는 한인 교회들에도 전달되었고, 어떤 교회들은 전체 교인들을 위해서 이 천부 이상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오늘의 양식’은 많은 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의 양식’은 한인 공동체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풍성하신 축복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바라: 할렐루야 교회 성도들의 ‘오늘의 양식’ 한국어 번역 사역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Our Daily Bread(오늘의 양식) 사역은 현재 37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의 양식’은 한국어를 포함해서 58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으며 전 세계의 150개국 이상의 국가에서 배포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기도는 언제나 김상복 목사님의 신앙 여정의 필수적인 부분이고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에 대해서 그가 가르쳐온 중요한 측면입니다.
김목사님: 제 생각에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중의 하나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구백 개 이상의 기도에 관한 구절들이 있고 성경의 인물들은 모든 일에 대해서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때로는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가운데 자신의 울분을 드러내기도 했고 항의 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도야 말로 인간의 내면의 가장 심연에 자리한 필요를 하나님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려움 중에 있는 많은 분들에게 저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라고 권해드리고 저 자신도 그렇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실까 하실까 하는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응답하시지 않으시면 어쩌지 하며 염려하곤 했죠. 하지만 기도에 있어서 좀 더 경험이 쌓이자 저는 깨닫게 되었어요.
“더 이상 내게 근심이 없네?” 기도 생활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여전히 근심과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 다음 단계로 올라서게 되면 조금 더 편안해 지면서 “괜찮아.” 라고 말하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에 접어 들게 되면 “괜찮아. 걱정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지난 세월들 가운데 어떻게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는지, 그리고 날 인도하시고 내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는지 직접 봐 왔잖아. 그 분이 내 기도를 들어 주실 거야. 기도하자.” 라고 말하게 될 겁니다.
바바라 : 더 많은 김상복 목사님의 권면의 말씀이 곧 이어집니다.
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Our Daily Bread(오늘의 양식)는 매일 수 백만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격려 해왔습니다. 모든 페이지에는 Our Daily Bread (오늘의 양식)의 스토리들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지혜의 성경구절들이 담겨 있습니다. Our Daily Bread (오늘의 양식)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영감과 격려를 더해주는 사역입니다.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성경의 지혜를 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바바라 :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자신이 쥐고 있던 인생의 계획들과 뜻을 위한 삶의 주도권을 주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은 중요한 신앙적 발걸음이요 만족스럽고 올바른 결정이었습니다.
김목사님: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위해 저를 목회자로 준비시키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도록 절 경험시켜 주시고 제 자신의 믿음과 교회,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선생님에게 매를 맞는 어려움을 겪게 하신 것도 저를 목회자로 다듬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부모님 없이 남한으로 와서 보낸 외로움의 시간과 사회에서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저를 강하게 만드시고 훈련시키셨구나 하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름아닌 하나님께서는 저의 생각을 훨씬 뛰어 넘어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게 있어 하나님은 저를 거두어 주시고 자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진정 놀랍고, 은혜로운,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바라: 귀한 간증의 말씀과 상황이 얼마나 어렵든지 간에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도록 권면해 주신 김상복 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라고 오늘도 우리에게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귀한 삶을 통한 간증…감사합니다..
스승님 되시는 김박사님 감사합니다. 제자 임은석목사 인사드립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적으로 힘든 중이지만 고등부 교사라는 귀한 사역을 주셨고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서 분반공부 준비를 하다가 말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찾던 중에 우연히 이 페이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신앙적으로 힘들었던 것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내 뜻에 필요한 하나님을 구했기 때문이란걸 알게 되었고 또한 기도도 잘 되지 않아 아이들에게 원하는 만큼 기도를 해주지 못해 늘 안타까웠는데 목사님 말씀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기에 기도를 드렸던 첫 기도에 바로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회복케 하시고 성장케 하신 주님, 축복의 통로가 되어주신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