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되어 준 ‘오늘의 양식’
작성자
odbkorea
작성일
2016-06-15 12:55
조회
5232
30년간의 직업을 접고 대여섯 달쯤 쉬었을까. 처음 한 달간은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관성의 법칙상 수십 년을 달리다 갑작스레 멈추니 당연한 반작용이 일었던 것이다. 이 지독한 무기력증을 떨치고자 집안을 온통 뒤집어 정리하기를 한 달여 - 이 ‘중노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아침마다 청계산을 올라 기도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평일 대낮에 집에 있다는 사실은 내겐 너무도 심각한 어색함이었다. 해가 훤할 때는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다들 나만 쳐다볼 것 같았다. 사실 누구도 신경 쓸 리 만무일 텐데.
집에서 프리랜서로 글도 쓰고 여행도 쫓아 다녀보고 했지만, 초등학교 입학 이래 단 하루도 ‘조직’에 속하고 있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자꾸 ‘외딴 섬’이 된 듯한 기분이 몰려왔다. 아이들 둘이 대학생이어서 아직 수입이 필요하기도 했다. 하여 이곳저곳 다시금 직업을 찾아봤다. 초등학교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픔을 갖고 살아온지라, 언제든 하나님이 부르실 수 있다 싶어, 30년 일했으면 됐지 이젠 좀 즐겁게 쉬어보자 먹었던 마음을 접고서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손 치더라도 쉰이 넘은 여자가 새로이 직장에 공채로 들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감사하게도 현재의 환경 관련 단체에 취업이 됐다. 자원봉사로라도 하고픈 환경 관련 일이었기에 급여가 이전의 반에 반 수준이어도, 계약직이어도 아주 잘됐다 싶었다.
전직이 영자신문 기자였던 터라 내가 하는 일은 기획홍보였다. 그러나 시스템이 잘 갖춰져 착착 돌아가던 규모 있는 직장의 간부직에 있다가, 비정규직의 평사원이나 마찬가지로 일하자니 소외감과 자격지심이 밀려왔다. 개인 사무실에 비서를 두고 있다가 딸 나이의 사원들과 나란히 앉아 일하는 것은 두 번째라 쳐도, 실무 책임자인 나를 건너뛰고 위의 실권자에게 바로 업무보고를 하는 식의 무시는 견디기가 좀 어려웠다.
이런 나에게 지난 석 달 동안 새 직장에서 견딜 힘이 되어 주었던 건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의 양식’이었다. 특히 최근호에서의 몇몇 구절은 정말 우리 주님이 주시는 위로 그 자체였다.
“오직 당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계속하십시오! 오직 순종,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들을 무익함에서 벗어나도록 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낮추려는 우리의 의지를 우리를 높이는데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2의 계획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며 해결책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점차 벗어나 예수님 더욱 더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왜 이렇게 직장이 돌아가나!’ 회의가 들고 ‘그만 둘까’ 싶을 때 이 영문 구절들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포스트잇에 적어 사무실 컴퓨터 화면 옆에 붙여 놓기도 했다. 퇴근 후 매일 1시간 반 동안 내가 사는 과천의 아름다운 숲과 호숫가 길을 걷는 시간에도 이 구절들로써 기도를 시작하고 또 마쳤다.
원래 웬만한 ‘오늘의 양식’ 영문들은 그날그날 외우려는 편이지만 그것은 영문학습의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6월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마지막 날 지금까지는 그야말로 ‘survival'을 위한 기도 그 자체였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이렇듯 ’오늘의 양식‘이 ’직장의 양식‘이 되는 생활은 계속될 듯하다.
그러나 앞으로 몇 개월 후 또는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정말 직장을 접게 된 연후에 내겐 ‘오늘의 양식’으로 이루고픈 꿈이 있다. 집에서 이 조그만 책자로 어른이건 청소년이건 이웃들을 위한 스터디 겸 기도모임을 이끌고자 하는 꿈이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의 양식’에 대한 현재의 감사함이 그때 꽃으로, 또 열매로 맺어지리라 소망한다.
성진선(집사, 경기 과천시 별양동 주공아파트)
집에서 프리랜서로 글도 쓰고 여행도 쫓아 다녀보고 했지만, 초등학교 입학 이래 단 하루도 ‘조직’에 속하고 있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자꾸 ‘외딴 섬’이 된 듯한 기분이 몰려왔다. 아이들 둘이 대학생이어서 아직 수입이 필요하기도 했다. 하여 이곳저곳 다시금 직업을 찾아봤다. 초등학교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픔을 갖고 살아온지라, 언제든 하나님이 부르실 수 있다 싶어, 30년 일했으면 됐지 이젠 좀 즐겁게 쉬어보자 먹었던 마음을 접고서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손 치더라도 쉰이 넘은 여자가 새로이 직장에 공채로 들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감사하게도 현재의 환경 관련 단체에 취업이 됐다. 자원봉사로라도 하고픈 환경 관련 일이었기에 급여가 이전의 반에 반 수준이어도, 계약직이어도 아주 잘됐다 싶었다.
전직이 영자신문 기자였던 터라 내가 하는 일은 기획홍보였다. 그러나 시스템이 잘 갖춰져 착착 돌아가던 규모 있는 직장의 간부직에 있다가, 비정규직의 평사원이나 마찬가지로 일하자니 소외감과 자격지심이 밀려왔다. 개인 사무실에 비서를 두고 있다가 딸 나이의 사원들과 나란히 앉아 일하는 것은 두 번째라 쳐도, 실무 책임자인 나를 건너뛰고 위의 실권자에게 바로 업무보고를 하는 식의 무시는 견디기가 좀 어려웠다.
이런 나에게 지난 석 달 동안 새 직장에서 견딜 힘이 되어 주었던 건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의 양식’이었다. 특히 최근호에서의 몇몇 구절은 정말 우리 주님이 주시는 위로 그 자체였다.
“오직 당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계속하십시오! 오직 순종,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들을 무익함에서 벗어나도록 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낮추려는 우리의 의지를 우리를 높이는데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2의 계획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며 해결책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점차 벗어나 예수님 더욱 더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왜 이렇게 직장이 돌아가나!’ 회의가 들고 ‘그만 둘까’ 싶을 때 이 영문 구절들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포스트잇에 적어 사무실 컴퓨터 화면 옆에 붙여 놓기도 했다. 퇴근 후 매일 1시간 반 동안 내가 사는 과천의 아름다운 숲과 호숫가 길을 걷는 시간에도 이 구절들로써 기도를 시작하고 또 마쳤다.
원래 웬만한 ‘오늘의 양식’ 영문들은 그날그날 외우려는 편이지만 그것은 영문학습의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6월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마지막 날 지금까지는 그야말로 ‘survival'을 위한 기도 그 자체였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이렇듯 ’오늘의 양식‘이 ’직장의 양식‘이 되는 생활은 계속될 듯하다.
그러나 앞으로 몇 개월 후 또는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정말 직장을 접게 된 연후에 내겐 ‘오늘의 양식’으로 이루고픈 꿈이 있다. 집에서 이 조그만 책자로 어른이건 청소년이건 이웃들을 위한 스터디 겸 기도모임을 이끌고자 하는 꿈이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의 양식’에 대한 현재의 감사함이 그때 꽃으로, 또 열매로 맺어지리라 소망한다.
성진선(집사, 경기 과천시 별양동 주공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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